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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주의로 무너진 미국 조선업...한국의 힘으로 ‘수리’한다

최고관리자 0 701 2025.02.01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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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이 지분 100%를 인수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소재 필리(Philly) 조선소 전경. /한화 필리 조선소 


지난달 2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최대 도시 필라델피아 최남단 네이비 야드(Navy Yard). 해군 시설과 조선소들이 밀집해 있는 이곳에 폭 124m, 높이 64m의 ‘골리앗 크레인’이 서 있었고, 옆에는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미국 국기 성조기와 ‘Hanwha Philly Shipyard(한화 필리 조선소)’라고 적힌 사기(社旗)였다. 이곳이 미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한국 기업의 조선소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앞서 한화오션은 지난해 6월 노르웨이 에너지 회사 아커(Aker)에서 1억달러(약 1445억원)에 필리 조선소 지분 10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여섯 달 뒤인 지난해 12월 19일 ‘한화 필리 조선소’로 새롭게 출발했다. 국내 기업이 미국 조선소를 인수한 첫 사례다.

오전 6시에 출근했던 근무조 직원들이 오후 3시가 되자 쏟아져 나왔다. 한 직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조선업 협력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 기업이 우리 회사를 인수한 만큼 기대감이 크다”고 했다.

43만㎡(약 13만평)에 달하는 조선소에서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골리앗 크레인이었다. 지상에서 64m 위에 있는 구조물 위에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필리 조선소(Philly Shipyard)’라고 쓰여있다. 전 소유주였던 ‘Aker(아커)’가 지워진 자리는 새 주인인 ‘Hanwha(한화)’로 교체된다. 조선소 인근 필라델피아 공항을 이용하는 항공기 승객들은 비행기 창밖으로 한화 필리 조선소 이름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화 필리 조선소가 위치한 네이비 야드는 미국 조선업과 미 해군의 상징적 장소다. 1876년부터 120년 동안 미 해군 조선소가 운영됐다. 2차 대전 시기에만 군함 53척을 만들었고, 군함 1218척을 유지·보수했다. 전후 미국 조선업이 한국과 중국 등 후발 주자들의 추격과 존스법(미국에서 건조한 선박만 미국 내 운항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법)으로 대표되는 보호주의로 경쟁력을 상실해 쇠퇴했고, 그 여파로 1996년 해군 조선소도 문을 닫았다. 이듬해 해군 조선소 터 일부 지역에 미 정부와 노르웨이 해운 회사 합작으로 필리 조선소가 만들어졌다. 이후 석유화학제품 운반선과 컨테이너선 등 대형 상선, 미 교통부 해사청 소속 다목적 훈련함, 해상 풍력 터빈을 인양·운반·설치하는 해양 풍력 설치선 등 다양한 용도의 선박을 건조해 왔다.

한화 필리 조선소는 필라델피아를 관통하는 스쿨킬강과 펜실베이니아주·뉴저지주의 경계 델라웨어강이 만나는 곳에 있다. 가로 45m, 세로 330m의 두 독(dock·선박 건조장)은 항공모함을 제외한 해군 주력 함정 대부분을 건조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미군 당국에서 면허를 발급받아 직접 군함 건조에 나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선박 제조에 필요한 철판 등 각종 부속품들을 재단·조립하는 작업장들도 독과 크레인과 맞닿아 있다.

한화 필리 조선소는 경남 거제시 한화오션 거제 사업장의 10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대형 선박을 만들 수 있는 조선소는 이곳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제너럴 다이내믹스 조선소 등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전략적 가치가 높은 시설이다.

쇠퇴한 미 조선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인근 스쿨킬강 변은 퇴역 군함들의 무덤 같았다. 건조된 지 30~40년은 됐을 거대한 함정 20여 척이 녹슨 채 방치돼 있었다. 미 해군은 전시에 이 퇴역 함정들을 수리해 쓴다는 계획이지만 미 조선업계의 유지·보수·정비(MRO·Maintenance, Repair, Overhaul) 역량을 고려하면 요원하다는 비관적 평가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화오션이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부터 한국과의 조선업 협력에 관심을 표하면서 한화 필리 조선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는 작년 11월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에서 “미국 조선업은 한국 도움이 필요하다. 한국의 군함·선박 건조 능력을 알고 있고, 보수·수리·정비 분야에서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해 한화오션이 필리 조선소 인수에 나섰을 때 조 바이든 당시 행정부가 안보상 이유로 어깃장을 놓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인수 심사는 90일 만에 끝났다. 중국 견제를 위해 조선 경쟁력을 높이려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보수·진보 진영을 불문하고 미국 행정부가 한국의 조선업에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실제로 한국 조선업은 한미 동맹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은 작년 미 해군과 함정 정비 협약을 맺고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미 군수 지원함과 7함대 소속 급유함의 MRO 일감을 수주했다. 6·25전쟁 때 한반도에 급파된 미 해군 7함대 함정을, 70여 년 뒤 한국 조선업체가 수리해 주는 셈이다. 한화 필리 조선소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미 해군과 함정 정비 협약을 체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미 조선 협력은 군사·안보 분야를 넘어 지역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한화오션은 현재 열 명인 주재원을 60~70명까지 확대해 국내의 첨단 선박 건조 기술을 현지 인력에 전수한 뒤 고용 확대에도 나설 방침이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6·25 때 미 해군 도움을 받은 한국이 75년 만에 미 해군 함정을 건조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존스법

1920년 미국 의회가 자국 조선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한 법. 정식 명칭은 연안무역법이지만 대표 발의자인 공화당 웨슬리 존스 상원의원의 이름을 딴 ‘존스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내에서 건조된 선박에 한해서만 미국 내 해상 운송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전쟁·재난 등 비상 상황에 한해서만 면책권이 인정된다. 미국 조선업의 국제 경쟁력를 저하시킨 요인으로도 지목되면서 미국 내에서 개정 여론도 커지고 있다.


필라델피아=박국희 특파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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